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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컬럼] 다음세대를 위한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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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42회 작성일 19-10-24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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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를 위한 소통

The Communication for Next Generation



지금 우리 사회는 소통(communication)의 문제로 몸살로 앓고 있다. “소통”이란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또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지금 계층 간의 갈등과 세대 간의 갈등, 노사 간의 갈등 등 온통 불통의 문제로 상호간에 신뢰를 잃어버리고 있다. 이제는 부모와 자녀 간에도, 교사와 학생 간에도, 선배와 후배 간에도, 친구와 친구 사이에서도 소통을 잃어버리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소통을 위해 좋은 역할을 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스마트 폰도, SNS의 영역도 오히려 소통의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세상은 소통의 부재로 말미암아 점점 불신과 정죄의 분위기로 채워지고 있다. 국민이 정부를, 국민이 정치인을, 국민이 언론을 불신한다. 아니 반대로 정부도 국민을, 정치인도 국민을, 언론도 국민을 쉽게 여기고 무시한다. 이러한 소통의 위기는 어떤 공동체이든지 붕괴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와 국민은 지난 수개월 동안 탄핵 정국과 현재 대선정국을 지나면서 서로 간에 큰 벽을 실감하고 있다. 


모두가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여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행동하였다고 말한다. 그것이 촛불집회이든, 태극기집회이든, 말없이 관망하며 기도를 하든지 모두가 나라를 위한다고 한다. 문제는 그로 인해서 나라와 민족의 미래가 더 좋아지기를 바라지만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 염려스럽다. 국론이 분열되고, 사회 공동체가 소통 없는 일방적인 자기주장만으로 대립하려 한다면 이 싸움은 계속 될 것이다. 


소통은 성숙한 사람들의 기본적인 소양이 되어야 한다. 소통에 가장 가까운 의미를 찾는다면 사귐이라고 볼 수 있다. 사귐은 모든 관계를 유지하는 통로이다. 소통이 없이는 하나가 될 수 없듯이 참된 사귐이 없이는 서로를 알 수가 없다. 사귐은 인격적인 교제를 전제로 한다. 인간에게 영혼의 참된 만족은 사실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요일1:3) 왜냐하면 인간의 영적 목마름의 해결은 결코 사람들에게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역에 사는 한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난 사건을 성경은 소개한다.(요4장) 그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만나게 된다.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여인이 가진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생수의 근원이 되는 예수님을 버리고, 물을 가두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를 계속 판 것과 같았다.(렘2:13) 인간의 영적 목마름은 결코 “터진 웅덩이”(세상이 주는 욕심들)로 해결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대에 터진 웅덩이를 붙잡고 몸부림치는 것은 마치 소통(사귐)이 없이 뭔가를 이루어 보려는 것과 같다. 이 시대와 사람들은 “목마름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 필요하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스스로 그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치유는 불가능한 것이다. 주님을 만날 때에 이 상처는 드러나게 될 것이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온전한 사귐은 이 정직한 고백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귐과 그로 인한 소통을 이루려면 자신의 방식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쌍방이 아닌 일방으로만 몰아가서는 결코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기장 큰 문제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일방적인 소리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의 소리를 진지하게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소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고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다음세대는 소통이 절실하다. 부모와 교사, 그리고 주변인들과 원만한 소통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이 가능하려면 주님과의 교제를 회복해야 한다. 인격적으로 주님과의 만남의 자리에 서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는 주님과의 사귐이다. 온전한 사귐을 위해서 자신의 방식을 포기해야 한다.(No way, This way) 주님과의 교제는 자신의 방식을 포기하고 살아야 가능하다. 그런 주님은 우리와 일상의 삶에서 만나기를 원하신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는 멸망해 가는 유다의 도시 예루살렘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5:1)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소통이 되는 사람을 뜻한다. 또한 “진리를 구하는 자”는 사람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소통이 되어 있는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소통하며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그 한 사람이 있으면 멸망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읍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국가공동체, 사회공동체, 가정공동체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이 “한 사람”이다.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 즉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람과 소통하는 한 사람은 나라와 민족, 가정과 사회를 구할 수 있다. 


오늘 우리의 다음세대는 소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상들이다. 이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역사관을 가르치려면 먼저 소통이 필요하다. 이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먼저 사귐의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들과 사귀려면 더 낮추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패배나 양보가 아닌 철저한 자기희생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죄의 담을 무너뜨리고 온전한 소통과 사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다음세대를 위한 소통을 위해서는 먼저 희생해야만 한다. 바로 십자가 희생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No cross, No crown.         


-황성건 목사 / 본 선교회 대표, 제자로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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