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컬럼] 목마름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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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460회 작성일 19-10-24 15:59본문
목마름의 비밀(The Secret of Thirstiness)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어떤 분의 "현대인의 굶주림"이라는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다. “현대인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인 풍요의 시대를 누리고 있으나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서로 소외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소외의 밑바닥에는 진정한 만남에 대한 굶주림이 있다.“ 여기에는 talking hungry(대화의 굶주림), touching hungry(접촉에 대한 굶주림), sex hungry(성에 대한 굶주림)이 있다고 한다. 자신의 얘기를 나눌 사람이 없고, 따스한 손길을 접촉할 사람이 없고, 참 사랑과 성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굶주림들은 인간이면 누구나 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욕구들 가운데 일부분이다. 이러한 욕구들은 성장 과정에서 가정에서 부모의 양육을 통해서 충족되어야 할 것들이다. 이러한 욕구들이 성장 과정에서 잘 채워질 때 그 사람은 보다 성숙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지 않고 이러한 욕구들이 성장 과정에서 제대로 충족되지 못할 때 그 사람은 늘 결핍된 욕구에 목말라하게 된다. 그러한 목마름이 정상적으로 충족되지 않을 때 매우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한 부정적인 욕구들은 그 사람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가정, 사회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도 된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러한 기본적인 욕구들이 다 충족되어지지 못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부모 자신이 그러한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잘 양육된 사람들이 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모 자신이 많은 결핍된 가운데 있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충족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알게 모르게 자녀들을 그들의 결핍을 충족시켜가는 도구로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굶주림은 인간의 역사에서 계속해서 대를 이어서 물려줄 수밖에 없는 하나의 비극이다. 이러한 욕구들에 굶주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삶의 형태들이 질투, 미움, 분노, 탐욕과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굶주림은 먹는 것이나 재물과 같은 것으로 충족시킬 수는 없다. 이러한 굶주림의 충족은 잘 양육된 한 인격의 실체와 만남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산상수훈 네 번째 복에서 '주리고 목마르다'라는 동사는 부분적이고 지엽적인 것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 온전한 것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갈증이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진주 상인의 비유는 이 복의 동사의 뜻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어느 진주 상인이 많은 진주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만족이 없었다. 그는 온전한 진주 하나를 찾아 헤매다가 어느 날 어느 진주 상으로부터 그것을 발견하고 그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들 전부를 팔아서 그것을 샀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기쁨으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전에 많은 진주를 소유하고 있었을 때 느끼지 못한 자족을 경험하게 된다.(마13:45~46)
산상수훈에 나타난 “의”는 윤리적인 뜻보다는 어떤 온전한 존재와의 만남이며, 그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사귐이요, 그 사귐 가운데서 생기는 삶의 추구의 내용들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인간 외적 요인이다. 부분적인 것이 아닌 전체적인 의미로서의 굶주림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때 구체적으로 그 은혜의 내용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첫째,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요일4:7~8)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극진히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는 굶주림에서 자족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 자족은 세상의 재물을 소유한데서 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는 자족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머니를 오랜 기간 떠나있던 어린아이에게 어머니의 품과 같은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어머니의 품은 따뜻함, 평안, 자족, 안식이다.
둘째,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이다.(엡4:32,골3:13) 용서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입증되었다. 이 용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도 역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주기도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과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된다.
셋째, 우리의 굶주림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을 때나, 알지 못하였을 때 다 같이 목마름이 있다. 그러나 그 목마름의 질은 다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였을 때에는 우리의 목마름은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게 된 후부터는 내적 고갈 가운데서 목마름이 아닌 내적 충만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 그가 기뻐하시는 일에 대해 배고픔이 있다. 그리고 그 배고픔이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게 한다. 그러나 그 행동은 그 전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평안과 자유함이 있다.
그때 그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 하나님께서 마쳐주실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서 그 일을 해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기다리며 살 수 있도록 그 나라를 약속으로 주신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희망 가운데서 살아가게 된다. 산상수훈 네 번째 복에서 말하는 주림은 이러한 것들에 대한 주림을 넘어선 것이다. 이 주림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의'라고 말씀한다. 그 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
이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해 줄 수 있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창고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만들어 줌으로 은혜와 평강을 공급해 주는 곳이다. 다음세대에게 건강한 목마름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죄로 말미암아 갖는 세속적 목마름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목마름, 의에 대한 목마름을 심어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언제나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속삭이신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에게 자족함이 있다." 우리가 갈구하고 기다리는 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서는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실현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차 나타날 그 나라를 고대하고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히 자족함을 얻게 될 것이다. 이 목마름의 비밀을 다음세대에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
-황성건 목사 / 본 선교회 대표, 제자로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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